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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드로 페르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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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산드로 페르티니는 이탈리아의 정치인이자, 제7대 이탈리아 공화국 대통령이었다. 그는 제노아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여 리구리아 노동운동에 참여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참전을 반대하여 군에서 훈장을 받았으며, 파시즘 저항 운동에 참여하여 투옥되기도 했다. 1945년 북이탈리아 국민해방위원회 지도자로서 무솔리니 몰락에 기여했고, 1968년 이탈리아 하원 의장을 역임했다. 1978년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1985년까지 재임했으며, 재임 기간 중 테러와 사회적 혼란에 맞서 국민의 신뢰를 회복했다. 그는 또한 국제적인 활동을 펼치며 사회 정의를 옹호했고, 1990년 9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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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드로 페르티니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공식 초상화, 1978년
공식 초상화, 1978년
이름알레산드로 주세페 안토니오 페르티니
출생일1896년 9월 25일
출생지스텔라, 이탈리아 왕국
사망일1990년 2월 24일
사망지로마, 이탈리아
배우자카를라 볼톨리나 (1946년 6월 8일 결혼)
정당PSU(1924–1930)
PSI(1930–1990)
모교제노바 대학교
모데나 레조 에밀리아 대학교
피렌체 대학교
서명Firma Pertini.png
로마자 표기Sandro Pertini
이탈리아 대통령
직책이탈리아 대통령
임기 시작1978년 7월 9일
임기 종료1985년 6월 29일
이전 대통령조반니 레오네
다음 대통령프란체스코 코시가
총리줄리오 안드레오티
프란체스코 코시가
아르날도 포를라니
조반니 스파돌리니
아민토레 판파니
베티노 크락시
하원 의장
직책하원 의장
임기 시작1968년 6월 5일
임기 종료1976년 7월 4일
이전 의장브루네토 부치아렐리 두치
다음 의장피에트로 인그라오
이탈리아 사회당 서기
직책이탈리아 사회당 서기
임기 시작1945년 8월 1일
임기 종료1945년 12월 18일
이전 서기피에트로 넨니
다음 서기로돌포 모란디
의회 경력
상원 의원이탈리아 상원 종신 의원 (1985년 6월 29일 - 1990년 2월 24일) (직위상)
상원 의원 (1948년)제헌의회 의원으로서 자동 임명 (1948년 5월 8일 - 1953년 6월 24일)
하원 의원이탈리아 하원 의원 (1953년 6월 25일 - 1978년 7월 7일)
선거구제노바–임페리아–라스페치아–사보나
제헌의회 의원이탈리아 제헌의회 의원 (1946년 6월 25일 - 1948년 1월 31일)
제헌의회 선거구제노바–임페리아–라스페치아–사보나
훈장
훈장OMCA

2. 약력

사보나 주 스텔라 출신으로, 제노바 대학교에서 법학 학위를 취득했다. 대학 시절 철학 교사 아델키 바라토노(Adelchi Baratono)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 사상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는 훗날 리구리아 지역 노동 운동에 참여하는 배경이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는 이탈리아의 참전을 반대했으나, 참전하여 용감성을 인정받아 훈장을 받았다. 전쟁 후인 1918년 통일 사회당(PSU)에 입당하며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2. 1. 출생과 성장

산드로 페르티니는 사보나 주의 스텔라에서 지주인 알베르토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바라체(Varazze)의 살레시오회 계열 학교와 사보나의 "키아브레라(Chiabrera)" 리체오(고등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이후 제노바 대학교에서 법학 학위를 취득했다.

대학 시절, 개혁적 사회주의자였던 철학 교사 아델키 바라토노(Adelchi Baratono)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 사상에 깊이 빠져들었으며, 이는 훗날 그가 리구리아 노동 운동에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페르티니는 이탈리아의 참전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나, 군에 입대하여 소위로 복무했고 용감성을 인정받아 훈장을 받았다.

1918년 전쟁이 끝난 후, 그는 통일 사회당(PSU)에 가입했다. 이후 피렌체로 이주하여 "협동조합(La Cooperazione)"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정치학 석사 학위(1924년)를 받았다. 피렌체 체류 기간 동안 그는 가에타노 살베미니(Gaetano Salvemini), 카를로 로셀리(Carlo Rosselli)와 넬로 로셀리(Nello Rosselli) 형제, 에르네스토 로시 등 반파시즘 지식인들과 교류했다. 이 시기 페르티니는 파시스트 검은셔츠단에게 여러 차례 폭행을 당했지만,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2. 2.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이탈리아제1차 세계 대전에 트리플 안탕트 편으로 참전했을 때, 페르티니는 19세였다. 그는 전쟁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에 입대하여 소위로 복무했으며 용감함을 인정받아 훈장을 받았다.

3. 반파시스트 운동

1922년 베니토 무솔리니파시즘 체제를 수립하고, 1924년 PSU 지도자 자코모 마테오티가 파시스트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페르티니는 반전체주의 운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투신하게 되었다.[22] 그는 토탈리즘 정권에 대한 저항에 헌신하며, 사회당 동료의 망명을 돕는 등 활동하다 체포되어 수감되기도 했다.

1935년 다시 수감된 페르티니는 감옥에서 병으로 고통받으면서도 파시스트 정권에 대한 사면 요구를 끝까지 거부하며 자신의 신념을 지켰다.[22] 그는 무솔리니 정권 하에서 고문을 겪었음에도 이상을 잃지 않았으며,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 “가장 완벽한 독재보다는 언제나 가장 불완전한 민주주의를 선택하겠다.”

: Alla più perfetta delle dittature preferirò sempre la più imperfetta delle democrazie.|알라 피우 페르페타 델레 디타투레 프레페리로 셈프레 라 피우 임페르페타 델레 데모크라치에.ita[4]

1943년 무솔리니 체제가 붕괴하며 석방된 그는 즉시 이탈리아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하여 나치 독일 점령군과 무솔리니의 새로운 정권인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에 맞서 싸웠다. 독일군에게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기도 했으나 파르티잔 동지들의 도움으로 구출된 후, 북부 이탈리아로 이동하여 이탈리아 사회당(PSI)의 집행 위원으로서 파르티잔 전쟁을 조직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에는 북이탈리아 국민해방위원회(CLNAI)의 지도자 중 한 명으로 활동하며, 1945년 4월 25일 밀라노에서 총파업과 봉기를 주도하여 파시즘 정권의 몰락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그는 반파시스트 및 레지스탕스 운동의 영웅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22]

3. 1. 파시즘에 대한 저항

1922년 베니토 무솔리니파시즘 체제를 수립한 이후, 1924년 PSU의 지도자 자코모 마테오티가 파시스트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페르티니는 반전체주의 운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가담하게 되었다.[22] 그는 토탈리즘 정권에 대한 저항에 헌신했으며, 1926년에는 구금 선고를 받았으나 잠적에 성공했다. 이후 카를로 로셀리, 페루치오 파리와 함께 사회당의 중요 인물이었던 필리포 투라티의 프랑스 탈출을 조직하고 도왔다. 페르티니는 1926년까지 이탈리아에 남아 석공으로 일했다. 이탈리아 프리메이슨 역사가 알도 알레산드로 몰라는 이 시기 페르티니가 프랑스 망명 중이던 이탈리아 대동방 인사들과 관계를 맺었다고 주장했으나[5], 이는 기록 보관소의 문서로는 뒷받침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이탈리아로 돌아온 그는 피사에서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10년형을 선고받았다.

1935년, 페르티니는 티레니아 해의 폰티네 제도에 속한 산토 스테파노 섬(벤토테네)에 수감되었다. 그는 이탈리아가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이후인 1943년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수감 중 심각한 질병으로 고통받았지만, 그는 결코 사면을 요구하지 않으며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지켰다.[22]

1943년 베니토 무솔리니가 체포되면서 파시스트 체제가 붕괴하자 페르티니는 석방되었다. 석방 직후 그는 나치 독일 점령군과 무솔리니의 새로운 정권인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에 맞선 이탈리아 레지스탕스 운동에 즉시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 독일군에게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기도 했지만, 파르티잔의 급습으로 극적으로 구출되었다. 이후 페르티니는 북부 이탈리아로 이동하여 로돌포 모란디, 레리오 바소와 함께 이탈리아 사회당(PSI)의 집행 위원으로서 파르티잔 전쟁을 조직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반파시스트 저항 운동의 영웅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22]

페르티니는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에 이탈리아 공산당의 루이지 롱고 등과 함께 북이탈리아 국민해방위원회(CLNAI)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1945년 4월 25일 밀라노에서 반파시스트 봉기를 주도하며 독일 점령군에 대한 총파업을 선언했고, 이는 무솔리니의 죽음(4월 28일)과 파시즘 정권의 완전한 몰락으로 이어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CLNAI는 베니토 무솔리니를 비롯한 파시즘 지도자들에 대한 전쟁 범죄 재판 설치를 결정하기도 했다. 당시 임시정부 수상이었던 페르치오 파리는 무솔리니 처형 자체에는 동의했으나, 처형 후 시신을 잔혹하게 전시한 방식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무솔리니 정권 하에서 고문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페르티니는 자신의 이상과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 "가장 완벽한 독재보다는 언제나 가장 불완전한 민주주의를 선택하겠다."

: Alla più perfetta delle dittature preferirò sempre la più imperfetta delle democrazie.ita[4]

3. 2. 투옥과 망명

1922년 베니토 무솔리니파시즘 체제를 수립한 이후, 1924년 PSU의 지도자 자코모 마테오티가 파시스트에게 암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페르티니는 토탈리즘 정권에 대한 저항, 즉 반전체주의 운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헌신하게 되었다.[22] 1926년 그는 구금 선고를 받았으나 잠적에 성공했다. 이후 카를로 로셀리, 페루치오 파리와 함께 사회당의 주요 인물이었던 필리포 투라티가 프랑스로 탈출하는 것을 조직하고 도왔다. 페르티니는 1926년까지 이탈리아에 남아 석공으로 일했다. 이탈리아 프리메이슨 역사가 알도 알레산드로 몰라는 페르티니가 이 시기 프랑스 망명 중이던 이탈리아 대동방 인사들과 관계를 맺었다고 주장했으나[5], 이는 기록 보관소의 문서로는 뒷받침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이탈리아로 돌아온 그는 피사에서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10년형을 선고받았다.

1935년, 페르티니는 티레니아 해의 폰티네 제도에 속한 산토 스테파노 섬 (벤토테네)에 다시 수감되었다. 이탈리아가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이후에도 그는 1943년까지 그곳에 갇혀 있었다. 수감 중 심각한 병으로 고통받았지만, 페르티니는 결코 사면을 요구하며 파시스트 정권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무솔리니 정권 시절 고문을 당했음에도 자신의 이상과 신념을 잃지 않았다.

: “가장 완벽한 독재보다는 언제나 가장 불완전한 민주주의를 선택하겠다.”
(Alla più perfetta delle dittature preferirò sempre la più imperfetta delle democrazie.|알라 피우 페르페타 델레 디타투레 프레페리로 셈프레 라 피우 임페르페타 델레 데모크라치에.ita)[4]

1943년 베니토 무솔리니가 체포되고 파시스트 체제가 붕괴되면서 그는 석방되었다. 석방 이후 페르티니는 즉시 나치 독일 점령군과 무솔리니의 새로운 꼭두각시 정권인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에 맞선 이탈리아 레지스탕스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 독일군에게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기도 했지만, 파르티잔 동지들의 급습으로 극적으로 구출되었다. 이후 페르티니는 북쪽으로 이동하여 로돌포 모란디, 레리오 바소와 함께 PSI의 집행 위원으로서 파르티잔 전쟁을 조직하는 데 힘썼다. 그는 1945년 4월 25일 밀라노에서 일어난 봉기에서 주요 역할을 수행했으며, 이 봉기는 결국 무솔리니의 죽음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그의 행적은 페르티니를 반파시스트·레지스탕스 운동의 영웅으로 만들었다.[22]

3. 3. 레지스탕스 활동

1922년 베니토 무솔리니가 파시즘 체제를 수립한 이후, 1924년 사회당(PSU) 지도자 자코모 마테오티가 파시스트들에게 암살당하자 페르티니는 토탈리즘 정권에 대한 저항 운동에 더욱 헌신하게 되었다.[22] 1926년, 그는 카를로 로셀리, 페루치오 파리와 함께 당시 사회당의 중요 인물이었던 필리포 투라티의 프랑스 망명을 조직하고 도왔다. 같은 해 구금 선고를 받았으나 잠적에 성공했고, 1926년까지 이탈리아에 남아 석공으로 일했다. 이탈리아 프리메이슨 역사가 알도 알레산드로 몰라에 따르면, 이 기간 동안 페르티니는 프랑스 망명 중이던 이탈리아 대동방 인사들과 관계를 맺었다고 하나,[5] 이는 기록 보관소의 문서로는 뒷받침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이탈리아로 돌아왔다가 피사에서 체포되어 10년 형을 선고받았다.

1935년, 페르티니는 티레니아 해의 폰티네 제도에 있는 산토 스테파노 섬과 벤토테네에 다시 수감되었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에도 1943년까지 수감 생활을 이어갔다. 수감 중 심각한 질병으로 고통받았지만, 결코 사면을 요구하지 않으며 신념을 지켰다.[22] 무솔리니 정권 하에서 고문을 당했음에도 그는 자신의 이상을 잃지 않았으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기도 했다.[4]

> “가장 완벽한 독재보다는 언제나 가장 불완전한 민주주의를 선택하겠다.”

> (Alla più perfetta delle dittature preferirò sempre la più imperfetta delle democrazie.ita)

1943년 7월, 베니토 무솔리니가 실각하고 체포된 지 한 달 후 페르티니는 석방되었다. 석방 직후 그는 나치 독일 점령군과 무솔리니가 세운 괴뢰 정권인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에 맞서 싸우는 이탈리아 레지스탕스 운동에 합류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그는 반파시스트 및 레지스탕스 운동의 상징적인 인물로 부상했다.[22]

레지스탕스 활동 중 독일군에게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동료 파르티잔들의 기습 작전으로 극적으로 구출되었다. 이후 북부 이탈리아로 이동하여 로돌포 모란디, 레리오 바소 등과 함께 이탈리아 사회당(PSI)의 집행 위원으로서 파르티잔 조직과 항전을 이끌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에는 공산당의 루이지 롱고 등과 함께 북이탈리아 국민해방위원회(CLNAI)의 지도자가 되었다. 1945년 4월 25일, 페르티니는 밀라노에서 나치 독일 점령군과 파시스트 잔당에 대항하는 총파업 봉기를 선언하고 주도했다. 이 봉기는 이탈리아 북부 해방과 파시즘 정권의 완전한 몰락을 가져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CLNAI는 베니토 무솔리니를 비롯한 파시스트 지도자들에 대한 전쟁 범죄 재판 개최를 결정했으며, 이는 4월 28일 무솔리니의 죽음으로 이어졌다. 당시 총리였던 페르치오 파리는 무솔리니 처형 자체에는 동의했으나, 처형 후 시신을 공개적으로 전시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나타냈다.

4. 정치 활동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산드로 페르티니는 이탈리아 사회당(PSI)의 주요 인물로 활동하며 새로운 공화국 건설에 참여했다. 그는 이탈리아 공산당에 대해 비타협적인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당내 부패와 식민주의를 강하게 비판하는 등 독자적인 정치 노선을 걸었다. 1968년부터 1976년까지 이탈리아 대의원회 의장을 역임했으며, 이후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6]

4. 1. 전후 정치 참여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페르티니는 공산당의 루이지 롱고 등과 함께 북이탈리아 국민해방위원회(CLNAI) 지도부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베니토 무솔리니를 비롯한 파시즘 지도자들에 대한 전쟁 범죄 재판 설치를 결정했다. 1945년 4월 25일, 그는 북이탈리아를 점령 중이던 독일군과 파시스트 세력에 맞선 총파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으며, 이는 무솔리니 정권의 몰락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무솔리니는 4월 28일 처형되었다).

당시 총리였던 페르치오 파리는 무솔리니 처형 자체에는 동의했으나, 처형 후 시신을 잔혹하게 전시한 방식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전쟁이 끝나고 1946년 이탈리아 헌법 국민투표를 통해 군주제가 폐지되자, 페르티니는 피에트로 넨니와 함께 이탈리아 사회당(PSI) 재건에 힘썼으며, 1945년부터 1946년까지 당 서기장을 역임했다. 이후 새로운 공화국의 이탈리아 헌법을 제정하기 위한 이탈리아 구성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전후 정치 활동 기간 동안 그는 사회당 지도부의 일원으로 활동하면서도 독자적인 목소리를 냈다. 이탈리아 공산당에 대해서는 비타협적인 태도를 견지했으며, 사회당이 추진하는 일부 정책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시각을 보였다. 또한 모든 형태의 식민주의와 이탈리아 정부 및 사회당 내부의 부패를 강력히 비판하며 자신만의 정치적 입장을 확고히 했다.

1968년에는 이탈리아 대의원회 의장으로 선출되어 1976년까지 그 직을 수행했다.[6]

4. 2. 하원 의장

1945년 4월 25일 이탈리아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1946년 이탈리아 헌법 국민투표를 통해 군주제가 폐지되자, 페르티니는 새로운 공화국의 이탈리아 헌법 제정을 위한 이탈리아 구성의회(La Costituente|라 코스티투엔테ita)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전후 시대에는 이탈리아 사회당(PSI)의 지도부 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이탈리아 공산당에 대해 비타협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PSI가 추진하는 정책 중 일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입장을 나타냈다. 또한 모든 형태의 식민주의이탈리아 국가 및 사회당 내부의 부패를 강하게 비판하며 독자적인 정치 노선을 걸었다.

1968년 이탈리아 대의원회 의장으로 선출되어 1976년까지 재임했다.[6]

5. 대통령

1978년 7월, 조반니 레오네 대통령의 사임 이후 혼란스러운 정국 속에서 의회 간접선거를 통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7][23][24] 이로써 사회당 출신 첫 대통령이 탄생했으며, 이탈리아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이 출범하게 되었다.

당시 81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페르티니는 상당한 활력과 정력을 보여주며,[7] 정치적 위기를 수습하고 이탈리아 정부와 제도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25][7] 그의 재임 기간은 붉은 여단 등 극단주의 테러가 극심했던 Anni di piombo였으며,[7] 마피아 문제,[7] 바티칸 시국과의 관계 재정립(라테란 조약 개정) 등 국내외적 과제에 직면했다. 페르티니는 테러와 폭력, 조직 범죄를 공개적으로 규탄하는 단호한 입장을 취했다.[7]

국제적으로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아파르트헤이트, 칠레아우구스토 피노체트 독재 정권,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등에 대해 명확한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7] 1982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1982년 FIFA 월드컵 결승전에 참석하여 이탈리아의 우승을 열정적으로 응원하는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탈리아가 세 번째 골을 넣자 서독 대표단을 향해 손가락을 흔들며 "그들은 우리를 더 이상 따라잡지 못할 것"이라고 외친 일화는 유명하다.[8]

1985년, 후임으로 프란체스코 코시가가 선출되자 임기 종료 며칠을 앞두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났고, 이후 종신 상원의원이 되었다.

5. 1. 대통령 선출

대통령 재임 시절의 페르티니


1982년, 퀴리날레 궁에서 페르티니와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군대를 사열하다


1972년~1976년 페르티니


1978년 6월 15일, 기민당 소속 조반니 레오네 대통령이 록히드 사건에 연루되어 임기 종료 6개월을 앞두고 사임하였다.[23] 이에 따라 새로운 대통령 선출 절차가 시작되었다.

초반에는 공산당의 지지를 받는 조르조 아멘드라(아벤티노파 지도자 조반니 아멘드라의 아들)와 기독교 민주당의 구이도 고넬라 전 공공교육부 장관이 유력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여러 차례의 투표에도 과반수를 얻지 못했다. 6월 29일 제1차 투표 당시에는 페르티니의 이름은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7월 1일 제4차 투표에서 고넬라가 사퇴하면서 대통령 선출은 더욱 혼란에 빠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7월 6일 제12차 투표 이후, 사회당은 태도를 정하지 못하다가 페르티니에게 출마를 요청했다. 페르티니는 공산당의 지지까지 확보하여 7월 8일 제16차 투표에서 총 995표 중 832표라는 압도적인 득표로 이탈리아 공화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7] 그는 다음 날인 7월 9일 정식으로 취임 선서를 하고 업무를 시작했다.[24] 이로써 레오네 대통령 사임 이후 2주간 지속된 정치적 공백 상태가 해소되었으며, 왕정 시대부터 역사를 이어온 사회당에서 처음으로 대통령이 배출되었고, 이탈리아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이 출범하게 되었다.

당시 81세의 고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페르티니는 상당한 활력과 정력을 보여주며 이탈리아 정부와 제도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7]

5. 2. 국내 정책



1978년 6월 15일, 록히드 사건에 연루된 기민당 소속 조반니 레오네 대통령이 임기 만료 6개월을 앞두고 사임했다.[23] 페르티니는 의회 간접선거를 통해 후임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1978년 7월 9일 정식으로 취임하여 이탈리아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을 출범시켰다.[24] 그는 81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활력과 정력을 보여주었고,[7] 레오네의 사임으로 혼란에 빠진 이탈리아의 정치 위기를 수습하고 정부와 제도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25]

그러나 페르티니의 재임 기간은 붉은 여단과 같은 극단주의 테러 조직의 활동이 극심했던 '납의 시대' (''Anni di piombo'') 와 겹쳤다. 페르티니는 이러한 폭력 행위를 공개적으로 강력히 규탄했다.[7] 또한, 그가 취임한 해에 교황 요한 바오로 1세가 즉위 33일 만에 급사하면서 타살 의혹이 제기되었고, 1981년에는 요한 바오로 1세의 죽음과 관련된 인물들의 이름이 거론된 P2 사건이 터져 사회적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이 외에도 코사 노스트라가 일으킨 제2차 마피아 전쟁과 P2 사건 연루 의혹을 받던 암부르시아노 은행의 로베르토 칼비 행장이 암살되는 등 조직 범죄 문제도 심각했다. 페르티니는 이탈리아의 조직 범죄에 대해서도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7]

이러한 혼란 속에서도 페르티니는 이탈리아 정부와 제도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는 데 기여했다.[7] 1981년에는 조반니 스파돌리니 정부 구성을 주재했는데, 이는 알치데 데 가스페리 시대 이후 처음으로 기독교 민주당 소속이 아닌 총리가 이끄는 정부였다. 또한 교황청과의 협의를 통해 라테란 조약을 개정하여 "가톨릭 교회는 이탈리아에서 특별한 지위를 지닌다"는 조항을 삭제했다. 그의 정치적 입장은 사회정의를 추구하는 방향이었다.

페르티니는 이러한 국내 문제들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려 했지만,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정계, 경제계, 마피아, 노동조합 등 다방면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하던 줄리오 안드레오티 전 총리의 존재 등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1985년, 페르티니는 후임으로 프란체스코 코시가가 선출되자 임기 종료 며칠을 앞두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5. 3. 종교 및 사회 정책

1984년 6월 16일, 아다멜로 산에서 비밀 스키 여행을 즐기는 산드로 페르티니 대통령과 요한 바오로 2세


개인적으로 무신론자였지만, 종교에 대해 깊은 이해를 보였다. 특히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과는 돈독한 우정을 나누며 공식 및 사적인 자리에서 자주 만나고 전화 통화도 자주 했다. 요한 바오로 2세 관련 저서 Accanto a Giovanni Paolo IIita에는 페르티니가 "어머니가 천국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으며, 무신론자인 아들이 교황과 친구가 된 것에 감동했을 것"이라고 언급한 일화가 실려 있다. 1981년 5월 13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피격 소식을 듣자마자 병원으로 달려가 밤늦도록 곁을 지켰으며, 교황이 위기를 넘겼다는 말을 듣고서야 돌아왔다. 그는 그해 연말 이탈리아 국민들에게 보내는 신년사에서 이 사건을 회고하기도 했다.[10]

페르티니 재임 중 가톨릭 교회와의 관계에도 변화가 있었다. 1978년 교황 요한 바오로 1세가 재위 33일 만에 급사하여 암살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으며, 그의 뒤를 이어 455년 만에 비(非)이탈리아인인 요한 바오로 2세가 선출되었다. 페르티니 정부는 교황청과의 협의를 통해 라테라노 조약을 개정하여 "가톨릭 교회는 이탈리아에서 특별한 지위를 가진다"는 조항을 삭제했다.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이탈리아는 극좌 및 극우 테러가 만연한 '납의 시대(ita)'를 겪고 있었다. 페르티니는 붉은 여단 등의 폭력을 공개적으로 규탄했으며, 알도 모로 전 총리나 카를로 알베르토 달라 키에자 장군 암살 사건의 실행범들을 강하게 비난하는 등 모든 형태의 극단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또한 이탈리아의 조직 범죄 문제 해결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국제적으로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아파르트헤이트, 칠레아우구스토 피노체트 독재 정권 등 독재 정권과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대해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1982년 3월 일본을 방문했을 때는 참의원 본회의장에서 전면적인 핵 군축을 호소하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 그의 정책 기조는 사회정의 실현에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불안은 지속되었다. 1981년에는 요한 바오로 1세 급사 사건과 연관된 인물들의 이름이 포함된 P2 사건이 발생했으며, 제2차 마피아 전쟁과 P2 사건에 연루된 암브로시아노 은행의 로베르토 칼비 행장이 암살되는 등 혼란이 끊이지 않았다. 페르티니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응하려 했으나, 정계, 경제계, 마피아, 노동조합 등 다방면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하던 보수 성향의 줄리오 안드레오티 전 총리 등의 존재로 인해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5. 4. 대외 관계



백악관에서 열린 환영 만찬회. 악수하는 사람은 프랭크 시나트라, 후열은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 부부


이탈리아 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된 페르티니는 81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활발한 대외 활동을 펼쳤다. 그는 해외 고위 인사들과의 만남과 순방 일정을 적극적으로 소화하며 이탈리아 정부와 제도에 대한 국제적 신뢰를 회복하는 데 기여했다.[7]

페르티니는 국내외의 여러 문제에 대해 단호한 입장을 보였다. 붉은 여단과 같은 극단주의 조직의 테러리즘과 이탈리아 내 조직 범죄를 강력히 규탄했으며,[7] 국제적으로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아파르트헤이트, 칠레아우구스토 피노체트 독재 정권 등 권위주의 체제에 반대 목소리를 냈다. 또한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비판하며 사회정의와 인권을 중시하는 태도를 견지했다.

바티칸 시국과의 관계에서는 중요한 변화를 이끌었다. 요한 바오로 2세 재임 중, 라테라노 조약 개정 협의를 통해 기존 조약에서 "가톨릭 교회는 이탈리아에서 특별한 지위를 가진다"는 조항을 삭제하였다. 이는 이탈리아 사회의 세속적 성격을 강화하는 조치로 평가받는다.

1982년 3월에는 일본을 방문하여 스즈키 젠코 당시 총리와 회담하고, 참의원 본회의장에서 연설하며 전 세계적인 핵 군축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1985년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국제 사회에서의 활동을 인정받아, 1988년 12월 독일연합국협회(DGVN)로부터 "평화와 국제 이해에 대한 탁월한 공헌, 특히 그의 정치적 윤리와 실용적인 인간성"을 기리는 오토 한 평화 메달을 첫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5. 4. 1. 대한민국과의 관계

페르티니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며, 남북회담을 통한 대한민국 정부의 평화 노력을 지지한다고 밝혔다.[29] 그는 "남북관계는 대화를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세계 평화에도 도움이 된다"고 주장했으며, 88서울올림픽이 성공적으로 개최되기를 바란다고 언급하기도 했다.[30]

6. 말년

이탈리아의 다른 대통령들과 마찬가지로, 페르티니도 퇴임 후 종신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90년, 로마에서 향년 93세로 별세하였다.[26]

1990년, 국내외적으로 격동의 시기를 겪은 이탈리아와 거의 한 세기를 함께한 그의 삶이 마침내 끝을 맺었다. “국민들로부터 가장 사랑받은 대통령”이라 불린 원로 대통령의 죽음은 깊은 애도 속에 묻혔고, 같은 해 알도 로시가 설계한 기념비가 1945년 봉기가 선포되었던 밀라노에 세워졌다.

7. 평가와 유산

1975년작 영화 카를로 리차니 감독의 ''무솔리니의 최후''에는 세르지오 그라치아니가 연기한, 페르티니에서 영감을 받은 인물이 등장한다.[13] 1980년대 초 안드레아 파첸차는 만화 시리즈 ''일 파르티지아노 페르트''("파르티잔 페르트")를 제작했는데, 이것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페르티니를 묘사한 코미디 만화이며, 만화가 자신이 조수로 등장한다.[14][15][16]

페르티니는 여러 이탈리아 노래 가사에도 언급되었다. 대표적으로 안토넬로 벤디티의 ''소토 라 피오자''("비 속에서", 1982), 스키안토스의 ''밥보 록''("아빠 록", 1982), 토토 쿠투뇨의 ''이탈리아노''("이탈리아인", 1983), 다니엘레 숙의 ''카로 프레시덴테''("존경하는 대통령님께", 1984), S.C.O.R.T.A.의 ''페르티니 댄스''(1984), 엑스-오타고의 ''페르티니 이즈 어 지니어스, 미린지니 이즈 낫 페임스''(2007) 등이 있다.[17][18]

1990년, 페르티니는 격동의 시기를 겪은 이탈리아와 거의 한 세기를 함께한 삶을 마감했다. "국민들로부터 가장 사랑받은 대통령"으로 불렸던 그의 죽음은 깊은 애도 속에 치러졌으며, 같은 해 알도 로시가 설계한 기념비가 1945년 봉기가 선포되었던 밀라노에 세워졌다.

8. 기타

페르티니는 1982년 FIFA 월드컵 결승전(이탈리아 대 서독)에 참석했다. 이탈리아가 세 골을 넣자, 페르티니는 손가락을 흔들며 "그들(독일)은 더 이상 우리를 잡지 못할 것이다"라고 외치기도 했다.[27] 당시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였던 파올로 로시는 "대통령께서 우리를 대통령궁으로 초대해 주신 그 날을 기억한다. 그 날은 대통령과 함께 있어서 나의 최고의 날이었다"고 회고했다.[28]

카를로 리차니 감독의 1975년작 영화 ''무솔리니의 최후''에는 세르지오 그라치아니가 연기한, 페르티니에게서 영감을 받은 인물이 등장한다.[13] 또한 1980년대 초 만화가 안드레아 파첸차는 ''일 파르티지아노 페르트''("파르티잔 페르트")라는 만화 시리즈를 제작했는데,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페르티니를 코믹하게 묘사한 작품으로 작가 자신이 조수로 등장하기도 한다.[14][15][16]

페르티니는 여러 이탈리아 노래 가사에도 언급되었다. 대표적으로 안토넬로 벤디티의 ''소토 라 피오자''("비 속에서", 1982), 스키안토스의 ''밥보 록''("아빠 록", 1982), 토토 쿠투뇨의 ''이탈리아노''("이탈리아인", 1983), 다니엘레 숙의 ''카로 프레시덴테''("존경하는 대통령님께", 1984), S.C.O.R.T.A.의 ''페르티니 댄스''(1984), 엑스-오타고의 ''페르티니 이즈 어 지니어스, 미린지니 이즈 낫 페임스''(2007) 등이 있다.[17][18]

페르티니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과 친분이 깊어 공식적, 사적으로 자주 만나고 전화 통화를 나누었다. 그는 극단주의에 반대했으며, 알도 모로 전 총리와 카를로 알베르토 달라 키에자 장군 암살 사건의 범인들을 강하게 비난했다. 개인적으로는 무신론자였으나, 종교에 대해 깊은 이해를 보였다.

마라넬로에 있는 페라리 공장을 방문했을 때, 대통령 전용차인 마세라티 콰트로포르테를 타고 갔는데, 엔초 페라리가 경쟁사 차량이라는 이유로 처음에는 접견을 거부했다가 결국 응했다는 일화가 있다.[19][20]

참조

[1] 일반
[2] 서적 Italština pro samouky a věčné začátečníky https://books.google[...]
[3] 웹사이트 Alessandro Pertini https://www.britanni[...] 2023-09-21
[4] 웹사이트 Frasi di Sandro Pertini https://www.frasiman[...]
[5] 서적 Storia della massoneria italiana Dalle origini ai nostri giorni Bompiani
[6] 학술지 Il rugby e l'immortalità del nome https://www.questia.[...] 2015
[7] 웹사이트 Associazione Nazionale Sandro Pertini http://pertini.it/en[...] 2024-10-16
[8] 유튜브 Video on Pertini exulting at the Italian team's victory https://www.youtube.[...]
[9] 웹사이트 Article on emagazine.credit-suisse.com http://emagazine.cre[...]
[10] 웹사이트 Presidential Address of New Year's Eve 1981 http://www.quirinale[...] The official website of the Presidency of the Italian Republic.
[11] 웹사이트 PALME IS NAMED A RECIPIENT OF AN F.D.R. FREEDOM MEDAL https://www.nytimes.[...] 1986-03-05
[12] 학술지 Svečana večera u čast Pertinija https://arhiv.slobod[...] 1979-10-12
[13] 웹사이트 Lizzani: Pertini wrote to me that Audisio didn't shoot the ''Duce'' http://www.laprovinc[...]
[14] 웹사이트 Il Partigiano Pert http://www.lastorias[...]
[15] 웹사이트 Pertini, the partisan president in the amazing comics of Andrea Pazienza http://www.slumberla[...]
[16] 웹사이트 Pertini on andreapazienza.it http://www.andreapaz[...]
[17] 웹사이트 The 5 best songs dedicated to Sandro Pertini http://www.orrorea33[...]
[18] 웹사이트 Sandro Pertini, our president ever, historical figure and man http://www.quotidian[...]
[19] 웹사이트 Enzo Ferrari, era il Ferragosto del 1988 https://www.formulap[...] 2022-08-14
[20] 웹사이트 マセラティ クアトロポルテ、イタリア大統領の公用車の歴史が40周年 https://response.jp/[...] 2019-12-18
[21] 뉴스 前 이탈리아大統領 페르티니 死亡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90-02-26
[22] 뉴스 이탈리아 大統領 〈페르티니〉 就任 http://newslibrary.n[...] 매일경제 1978-07-10
[23] 뉴스 이탈리아 大統領 〈페르티니〉 就任 http://newslibrary.n[...] 매일경제 1978-07-10
[24] 뉴스 이탈리아 大統領 〈페르티니〉 就任 http://newslibrary.n[...] 매일경제 1978-07-10
[25] 뉴스 이탈리아 大統領 〈페르티니〉 就任 http://newslibrary.n[...] 매일경제 1978-07-10
[26] 뉴스 前 이탈리아大統領 페르티니 死亡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90-02-26
[27] 유튜브 Video on Pertini exulting at the Italian team's victory https://www.youtube.[...]
[28] 웹인용 보관된 사본 http://emagazine.cre[...] 2021-08-09
[29] 뉴스 韓·伊방위산업協力합의 페르티니大統領·盧政務요담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81-11-18
[30] 뉴스 韓·伊방위산업協力합의 페르티니大統領·盧政務요담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81-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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